[콩루] 갈대 한 송이
지비
정신없이 시끄럽게 찌르르 울리는 알람 소리에 눈을 찌푸리며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뚜둑 하고 온몸에서 나는 뼈 소리는 덤으로 치자고. 어제 준영이가 알바하는 곳에 한 명 못 온다 해서 내가 괜히 대신 편의점 알바 대타 뛰어준다 해서 온갖 고생이란 고생을 다하는 바람에 아직도 온몸이 뻐근하단 말이야. 그래도 돈은 받았으니까. 그 돈으로 파스라도 사야 하나. 하여튼 계속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이 너무 거슬려서 알람을 끄려고 휴대폰을 잡으니 8시라 쓰여있었다. 너무 오래 잤나. 뭐 어젠 많이 고생했으니. 휴대폰을 막 눌러서 알람을 겨우 끄고선 간밤에 승준이에게 온 문자를 확인했다. 아 오늘 승준이랑 약속 있구나. 귀찮은데 굳이 나가야 할까 싶었지만 요 근래에 승준이랑 준영이랑 자주 안 놀긴 했으니까. 어제 고생도 했으니 오늘 푹 쉬어야지, 수고했다 어제의 나야
대충 기지개를 쭉 펴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근데 왜 하필이면 수라갈대공원이냐고... 한숨을 푹 쉬고는 물을 틀었다. 아 맞다 샤워기 고장 났었지 물 나오려면 한참 걸리던데 아 빨리 샤워기 고치든 새로 사던 해야 하는데.. 나는 샤워기에서 물이 나올 때까지 잠시 수라갈대공원을 생각하기로 했다. 수라갈대공원 생각하다 보면 물이 나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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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라갈대공원은 나랑 태형이와의 추억이 많이 깃든, 우리가 연애를 시작한 공간이다.
학교는 잠자는 곳이라고 생각하며 다니던 나는 사고도 별로 안쳤지만 문제아라고 불리었다. 내 주변에 친구도 없었고 아무도 나한테 다가오지 않았다. 고3 들어오고 전학 온 태형이가 나한테 친구가 돼주었지만. 우리는 서로의 비밀을 서로에게 말할 정도로 친하게 지냈다. 승준이랑 준영이도 대학교 들어오고 나서 친해진 거라.
태형이는 오자마자 학생회장이 되었다. 이런 보잘것없던 나한테 모범생이고 학생회장이었던 인기 많은 태형이는 너무 과분한 존재였다. 근데 의문점은 태형이가 연애 한번 안 해본 모솔이라는거?
태형이가 나랑 놀기 시작하면서 태형이는 온갖 욕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저 문제아인 나랑 논다는 이유만으로. 어느 날은 갑자기 교무실에 같이 선생님이 불러서 불려가질 않나.
"태형아 너 잘 하다가 갑자기 왜 훈이랑 놀아"
"혹시 뭐 불만인 거 있니?"
"아뇨..?"
"훈이가 괴롭히는 거 아냐?"
"너 막 꼬봉으로 삼고 말이야"
"엥 훈이가 왜 괴롭혀요? 저희 친군데요?"
"선생님 저 그런 사람 아닌데요..”
"휴.. 모르겠다 태형아 그냥 가봐 아 훈이는 여기 있고"
"네.."
"훈아 왜 순수하디 순수한 애를 더럽히려고 해"
“그게 무슨 소리예요 선생님;”
“너 태형이랑 놀지마 애 괜히 더럽힌다”
"아니 선생님 제가 무슨 짓을 했다고.."
“너 때문에 태형이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 알기나 해?”
“... 그건 그렇지만”
“후... 너도 그냥 가라 난 신경 안 쓴다”
게다가 그냥 나랑 태형이 지나가기만 해도 대놓고 수군거리지를 않나.
"야 문제아 온다;"
"야 장훈 돈 많은가 봐 전교회장 꼬시고"
"ㅋㅋ그니까;"
"혹시 전교회장이 장훈 좋아하는 거 아냐?"
"에이 설마~"
"그러지 않고서야 여태껏 받은 고백을 다 거절할 리가 없잖아"
"그렇긴 하네~"
“아니면 장훈이 전교회장 좋아하는 걸 수도 있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전교회장이 좀 불쌍한데?”
“그치?ㅋㅋㅋㅋ”
"아 근데 서로 좋아한다 생각하니까 좀 더럽다"
"그러게 전교회장 얼굴은 꽤 괜찮던데 게이였던 거야?"
"윽 손절각인데?"
그래도 나는 태형이랑 잘 지낼 수 있을 거 같았다. 내가 태형이 귀에 안 들어가게 만 하면 스트레스를 안 받게 한다면. 나만 힘들다면 나만 욕을 듣는다면 다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건 너무 어려운 생각이었나 보다. 그래도 나랑 태형이는 욕을 먹어가면서도 같이 놀았다. 점차 태형이도 친구들이 태형이를 떠나기 시작하고, 태형이 주변에는 어느 순간부터 나밖에 없었다. 태형이는 항상 나를 챙기고 나도 태형이를 챙기고, 의도치는 않았지만 어쩌다 보니 주변에는 나랑 태형이밖에 안 남아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태형이한테 고백을 받고 비밀연애를 하면서 승준이랑 준영이 빼고는 아무도 모르게 연애를 하면 할수록 태형이는 나한테 너무 과분한 존재라는 생각에 마음 편히 연애를 할 수가 없었다. 계속 나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나서 태형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냥 해어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이 추운 바람이 강하게 부는 우리가 연애한지 2년하고 2달쯤 지난 보름달이 엄청 이쁘게 둥글둥글하게 뜨고 바람이 강하게 쌩쌩 부는 아주 추운 겨울날 나는 태형이랑 우리 집에서 평소처럼 놀고 난 다음 집에 가기 전 천천히 걷다가 우리 집 근처 놀이터 입구 앞에서 멈춰서 태형이에게 겨우 입을 때서 이별을 고했다.
“저.. 태형아"
"응응 훈아- 왜?"
"어.. 진짜 미안한데 헤어지자”
“어?”
나한테 ‘헤어지자’라는 말을 듣고서는 놀라고 당황했는지 나를 애처롭게 쳐다보며 내 손을 꼭 잡는 너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너무 찢어지듯 아팠다. 하지만 너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었다. 너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나 따위는 아파도 괜찮았다. 아니 버틸 수 있었다. 눈을 한 번 지그시 감았다 뜨고 한숨을 한 번 푹 쉬고는 거짓말을 이어갔다.
“미안 네가 귀찮아졌어”
“.. 아니잖아 너 안 귀찮잖아 내 눈 봐봐”
나는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태형이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이게 마지막으로 보는 태형이의 눈이라 생각하니 눈물이 날 거 같았지만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는 아슬아슬하게 버텼다.
“아냐, 나 이제 너 귀찮아졌어. 진짜야”
".."
태형이는 내 눈치를 보더니 한숨을 푹 쉬고 꽉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리곤 놓은 자신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우리 사이에는 거센 바람과 정적만이 우리를 감싸고 있었다.
"그래도 고마웠고 사랑했어"
“.. 응.. 알았어.. 안녕, 내가 귀찮아졌다는데 내가 뭐 어쩔 수 있겠어.. 나도 고마웠어 훈아”
태형이는 태형이 특유의 씁쓸한 눈웃음을 씨익 짓고는 천천히 뒤로 돌아 내 집과는 반대인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태형이의 뒷모습이 점차 멀어지고 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손가락으로 보름달을 잡고는 달에게 빌었다. '태형이가 더 행복하게 해주세요, 그래서 나를 잊고 행복하게 다른 사람이랑 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속으로 소원을 빌고 나서 한 2~30분가량은 그 자리 그대로 쪼그려 앉아서 펑펑 울었다. 내 울음소리로 인해 온 세상이 떠나갈 정도로,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어떤 거와 비교해도 이길 수 있을 정도로 조용히 묵묵하게 몸만 움찔거리며. 태형이를 떠나보낸 이 아픔이 내 서럽게 우는 눈물로 가려지길 바라면서, 더 이상 나 같은 건 눈물로 가려져서 태형이가 보지 못하도록, 태형이가 남들과 평범한 사랑을 할 수 있도록, 그저 태형이가 나를 잊고 행복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한동안은, 아니 어쩌면 내가 애써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지금까지도 너에게 그 마지막 말을 듣고서 나의 마음은 우리가 헤어졌던 그 겨울날에 꽁꽁 얼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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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차가라... 어느새 물이 나왔는지 내 몸이 물로 다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물이 뚝뚝 떨어지고 으슬으슬 해질 때쯤 생각에서 빠져나와 정신을 차렸다. 대충 빠르게 씻고 나와서는 어제 골라놓아서 의자에 곱게 걸려있는 옷들을 입었다.
10시까지 수라갈대공원에서 만나기로 했으니까 천천히 집을 나섰다. 수라갈대공원은 버스를 타서 1시간가량 가면 있기 때문에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서 버스에 몸을 맡기었다. 그리고 아까 했던 생각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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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태형이랑 해어진 지 2년이 지났다. 엄청 풋풋한 고등학생이었던 태형이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나보다 괜찮은 사람을 만나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까. 평소에 내가 안 챙겨주면 밥을 잘 안 먹던데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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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서 내리고 편의점에서 음료수 하나를 사고 편의점에서 나오니 휴대폰에서 띠리링 하고 문자 하나가 왔다. 한승준이려나.
-장훈
-야
-야야야
-야 긴급
-? 무슨 일인데
-야 훈아 일단 진짜 미안
-???? 왜?
-우리 애인님이 아프대ㅠ 못 갈 듯
-? 아니 이미 나 여기에 와있는데..?
-진짜 미안.. 우리 주녕이 감기 걸리면 오래 아픈 거 알잖아..
-아니 나 이미 와있다니까?
-내가 나중에 밥 사줄게 진짜 미안 ㅠㅜㅜㅠㅠㅠ
-일단 니 애인이 아프다니까 별수 있나 나중에 커피도 쏠 거지?
-ㅇㅇ.. ㅜㅠㅠ 미안..
-ㅇㅇ 간호 열심히 해
-ㅇㅋㅇㅋ 진짜 미안
기껏 여기까지 왔지만 못 온다는 승준이의 연락에 짜증이 나서 한숨을 푹 쉬고는 괜히 애꿎은 돌멩이를 발로 툭툭 쳤다. 너만 아니었으면 태형이 생각도 안 했을 건데.. 짜증 나서 휴대폰을 집어던지고 싶었지만 산지 얼마 안 된 폰이라 액정이 나갈까 봐 꾹 참고 그냥 주머니에 핸드폰을 마구 쑤셔 넣었다. 여기랑 우리 집이랑 거리 좀 있어서 우리 집 가는 버스 오려면 시간 좀 걸릴 건데 여기서 뭐 하면서 시간 때우지.. 여기에 몇 번을 와서 여기에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가 그렇게 맛집인지 다 알고 있을 정도라 이젠 이곳도 지루하단 말이야. 태형이가 있다면 모를까.
늦가을이 되어서 제법 쌀쌀한 날씨에 화장실에 가서 옷을 애써 제대로 되어있는 옷을 점검하고 똑바로 다시 정리하고는 한숨을 푹 쉬고 화장실에서 나와 갈대밭을 걸으면서 걷다가 자연스럽게 다시 태형이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 그러고 보니까 내가 태형이랑 연애를 하게 된 계절도 지금 날씨 같은 늦가을이었는데. 늦가을이 와서 그런지 요즘 따라 태형이 생각이 자연스럽게 자주 나기 시작했다. 뭐, 작년에도 그랬으니까
사실 나는 태형이랑 헤어지고 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태형이를 잊은 적이 없었다. 기억 속에서 지우고 싶었지만 지우기에는 매우 매력이 넘치는 너무 착하고 다정한 아이여서 지나가다가도 번호를 따이던 태형이는 내 머릿속에 계속 떠돌아다녔다.
나는 터덜터덜 걷다가 어떤 한 장소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그 장소에서는 태형이가 나한테 고백하던 모습이, 갈대가 좋다며 갈대를 보러 총총 뛰어다니는 태형이가 눈앞에 아른아른했다. 오랜만에 태형이가 너무 보고 싶었다.
하지만 너는 나에게 너무 과분한 존재인 걸 내가 너를 가지려고 욕심내면 너만 더 힘들어지는걸. 여하튼 오래간만에 더 많이 태형이 생각을 했는지 계속되는 태형이 생각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고는 벤치에 앉아서 시간을 뻐기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벤치에 앉아있는 태형이 같이 생긴 사람을 보았다.
이제 태형이가 보고 싶어서 미쳤는지 사람들이 태형이로 보이는 건가 한숨이 나왔다. 할 것도 없고 해서 그냥 멀리서 그 사람을 빤히 관찰해보니까 정말 태형이랑 닮았다. 얼핏 보이는 그 사람의 옆모습에는 태형이의 특유의 연갈색 파마한 머리, 정말 모찌모찌 한 만질 때 기분 좋은 볼살, 하얀 피부, 그리고 옷 입는 스타일까지 딱 태형이었다. 하지만 한가지 다른게 있다면 내가 기억하는 태형이보단 좀 더 많이 야위었다는 거?
어차피 태형이가 여기를 올리는 없었기에 나만의 착각이겠지라고 생각을 하고는 태형이를 닮은 그 사람이 앉아있는 벤치 끝에 앉았다. 저 사람이 태형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도리도리하고 그냥 갈대를 구경하고 있었다. 계속 보다 보니까 태형이가 왜 갈대를 좋아했는지 알 거 같기도 하고..
갈대는 태형이가 제일 좋아하던 꽃이라서 원래 이맘때쯤에는 데이트하러 수라갈대공원에 자주 놀러 왔었다. 둘 다 여기까지 거리가 좀 있긴 하지만 그래도 태형이가 이곳을 좋아하는걸.
여하튼 계속 갈대를 바라보다가 애써 태형이만 더 생각날 거 같아 눈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옆을 바라보니 그 사람이 고개를 푹 숙인 상태로 콜록거리며 기침을 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 상태로 나와 그 사람은 눈을 마주쳤다. 그 사람은 마스크를 끼고 있었지만 바로 알 수 있었다. 그 사람은 내 착각이 아니라 진짜 태형이었다. 태형이는 고3 개학날 나한테 처음 말을 걸었던 날처럼 눈웃음을 짓고 배시시 웃으며 말을 걸었다.
“안녕, 훈아 우리 오랜만이네”
“.. 그러게 오랜만이다”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어’라는 말과 함께 배시시 웃던 얼굴이 확 바뀌면서 평소보다 더 씨익 웃는 너의 모습은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너무나 이뻐 보여서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나는 다시 태형이의 옆에 앉았다.
“응 안녕 나도 많이 보고 싶었어”
“훈아”
태형이가 한숨을 한 번 푹 쉬고는 입술을 깨물다가 내 옷깃을 잡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나 많이 보고 싶었잖아 승준이가 너 나 그리워한다고 많이 보고 싶어 한다고 이야기해줬었어”
“승준이가?”
“응 너 맨날 술 먹고 나면 나만 찾는다면서 힘들다고 말해줬었어”
"나 너 번호도 가지고 있어, 연락만 안 했을 뿐"
“그리고 너 나랑 헤어진 이유도 내가 귀찮아져서가 아닌 거도 알고 있었어 사실은..”
“그니까 훈아 나한테 우리가 헤어져야 했던 그 이유를 한 번만 알려주지 않을래?”
나는 묵묵히 태형이를 끌어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를 보면 하고 싶었던 말들이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고 그냥 그저 이러고 있었다. 그러다가 태형이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귀에 속삭였다.
"네가 나한테 너무나도 과분해서 네가 힘들까 봐 괜히 내가 너 고생만 시키는 거 같아서, 네가 나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났으면 좋겠기에 그랬어 나는 너가 행복했으면 그걸로 됐는걸"
“바보야아~ 나한테 좋은 사람이 너 말고 어디 있다고 그래”
“그러게 나도 많이 후회했어 미안..”
“많이 보고 싶었는데 너한테 연락하긴 민폐일 거 같아서 그냥 여기서 자주 기다리고 있었어.”
“응?”
“너랑 헤어지고 나서 1년 동안은 집 밖에 잘 안 나갔었다가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싶어서 매주 일요일에 여기에 앉아서 너랑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다가 해질 때쯤에 집에 들어가고 그랬었는데. 사실 이번에는 승준이가 여기서 만나기로 했는데 자기랑 준영이 못 온다고 말 안 했으면 안 오려 했거든 내가 감기 기운도 있고 해서"
“매번 여기 와서 너 보고 싶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래도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잠시 침묵이 우리를 1분가량 그 무엇보다도 포근하게 하지만 내 품보다는 덜 따듯하게 감쌌다. 그리고 태형이가 다시 말을 꺼냈다.
“아 맞다, 그래서 말인 데 훈이야”
“이렇게 살살 부는 바람이 나를 조심스럽게 간지럽히니 기분이 좋아서, 살살 부는 바람 속에서 따스하게 우리를 비춰주는 햇빛이 눈부신 너를 닮은 거 같아 좋아서, 내가 좋아하는 계절과 딱 그때 피는 이쁜 갈대와 내가 엄청 사랑하는 사람이랑 지금 같이 행복하게 있다는 게 기분이 좋아서 하는 말인 데 있잖아”
“내가 너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줄까 해, 아니 어쩌면 나한테 기회를 주는 걸 수도 있고..?”
“그래서 말이야 훈아, 이렇게 빠르게 지나가는 계절 속에서 내 인생 내 전부가 되어줄래?”
그 말이 끝나고 태형이는 내 품 속에서 슬며시 나오더니 자기 코트 안주머니에 있는 귀여운 갈대모양 인형을 꺼내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인형을 내 손에 꼬옥 쥐여주었다.
“우리 한 번 더 만나보지 않을래 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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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3년이 지났다. 나랑 태형이는 대학교까지 졸업해 같은 회사에 취직해서 남몰래 아직도 꽁냥거리며 비밀연애를 하고 있다.
태형이랑 연애를 하고 나서 겨울이어서 꽝꽝 얼어있던 내 마음은 어느새 녹아 몇 년이 지나도 따듯한 햇빛도 들면서 선선한 바람이 부는 너를 닮아 선선한 듯 포근한 늦가을이 되었다.
이렇게 선선히 부는 바람도 따스하게 우리를 감싸도는 햇빛도 너무나도 너랑 잘 어울려서 웃음이 났다. 앞에서 총총총 뛰어가는 너를 보며 싱긋 웃으며 갈대 하나를 살짝 잡아서 만지작거렸다.
"아이 훈아 안 오고 거기서 멍하니 서서 무슨 생각 해~ 나 솜사탕 먹고싶다니까아~?"
"아 그냥 네가 여기서 나한테 다시 고백했던 게 생각나서"
"아 그치 딱 여기였지?"
"그럼"
갈대 하나를 만지작거리다 몸을 큼큼 가다듬으며 태형이를 불렀다. 당황하는 너의 모습은 얼마나 귀여울까.
"태형아, 살살 부는 바람이 나를 조심스럽게 간지럽히니 기분이 좋아서, 살살 부는 바람 속에"
"아 진짜 장훈...! 아앗 진짜 거기까지! 나 부끄럽단 말이야! 그건 도대체 왜 외우고 있는 건데..!"
말을 가로막고선 내 쪽으로 총총 뛰어와 배시시 웃으며 얼굴을 붉게 붉히곤 내 품에 폭 안겨서 내 입을 자기 손으로 막는 너를 꼬옥 안고는 네가 너무 귀여워서 그냥 그만 놀리기로 했다. 진짜 사랑해 태형아 언제까지나 너만 사랑할게, 내가 널 평생 아껴주고 사랑해주고 행복이라는 감정을 평생 잊지 않게 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