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삼] 무제
간극
이 글은 학교폭력, 정신병 등 트라 우마를 일으킬 수 있는 소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용된 요소들은 절대 현실에서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을 인지하고 있고 본인은 해당 요소를 지지하거나 옹호하지 않으며 미화의 목적 또한 없음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
일기를 쓰는 것은 너를 덜어내는 일이다. 일기장을 펼치는 일이 두려운 이유는 모두 거기에서 온다. 덜어냈던 너를 다시 눈으로, 손으로, 코로 담게 되기에.
[눈삼 / 무제]
2018. 09. 07.
가을이 오고 있다. 날씨가 쌀쌀맞게 굴어서인지 교복 위에 두꺼운 옷을 입고 오는 학생들이 많아졌다. 멋모르고 대충 걸치고 나갔다가 큰일날 뻔했다. 내일부턴 가디건이라도 입어야지, 이대로는 안 되겠어.
낙엽이 들기 시작했다. 점점 물들어가는 모양새가 참 예쁘다. 알록달록히 옷을 챙겨 입은 것이 퍽이나 다정해 보였다. 그런 모습이 예뻐서 죽고 싶었다. 그러나 내일은 어떻게 될 지 궁금하여 죽지 못했다. 시답잖은 변명일지도 모른다.
세상은 덧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너무도 지배적이었다. 그리하여 어떤 것에도 재미를 붙일 수가 없었다. 갈대마냥 계속해서 바람을 따라 흔들리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정말 지루하고 따분했다. 무엇을 위하여 사는가? 그런 고상한 질문에는 차마 대답할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그래. 오랜만에 이렇게 펜을 잡고 일기를 쓰는 까닭은 이런 새삼스러운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 아니다. 반에 전학생이 왔다. 사실대로 말하면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일기에 적겠노라 생각하며 외우려 했던 거 같은데, 이상하게도 죄다 까먹어 버렸다. 성 씨가 정 이었던가? 글쎄, 아닌 것 같은데.
그 아이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어디서 뭘 하다 왔는지 머리가 새하얀 것이 자꾸 눈길을 끌었다. 마른 체형인지 교복은 길이가 맞는데도 헐거워 보였다. 왜 이렇게 자세히 보았느냐 물으면, 나도 모르겠다고 답하는 수밖에 없다. 무엇이 그렇게 나의 이목을 끌었는지. 왜 그 애를 일기에 적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했던 거라면 아무 효율없는 생각을 했다. 말 한번 걸지도 못할 것이 뻔하다. 뭘 바라겠어. 뭘 바라겠냐고.
감정이 격하기 그지없는 밤이다. 어서 자야겠다. 별다른 걸 할 힘도 없다.
2018. 09. 14.
그 애가 말을 걸었다. 별 내용은 아니었지만 불안하기 짝이 없다. 내가 그 애를 계속해서 쳐다보고 있었던 걸 들킨 걸까? 아니, 그럼 뭐 어때.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본 거지?
어쨌든, 그 애를 주시했던 건 나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온 지 일주일만에 어느새 자연스럽게 주위와 동화되어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고 있더라. 어찌 생각하면 참 대단했다. 나는 절대 해내지 못할 일이었다. 아, 이름을 이번에는 확실히 외워 왔다. 김준영. 지적을 받았는지 하얗던 머리는 새까맣게 변해 버렸다. 신기했다. 느낌이 한 순간에 변했다. 그리고 둘 다 어느 정도 마음에 들었다.
2018. 09. 15.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 일기장을 누군가 다른 사람이 볼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다. 그래서 모든 이야기를 자세히 쓰지 않는다. 하도 정신이 없어서 어디다 어떻게 두고 다닐지 몰라. 그래서 이렇게 하나 써 둡니다. 혹시 이걸 읽고 있다면 학교 내 분실물 보관함에 넣어 주세요. 더 읽지 말고. 흥미가 생길 거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읽지 말아주세요. 내가 기댈 유일한 공간에 손대지 말아주세요. 부탁이에요.
2018. 09. 17.
일기장을 잠시 잃어버렸다. 누가 읽었을지 걱정이지만 잃어버린 자리 그대로 있는 걸 보니 괜찮아 보였다. 또 잃어버리기 전날 다행히 저런 걸 써 둬서 안심이다. 별 일은 없었을 것이다.
2018. 09. 18.
찰나의 짧은 순간이었다. 뭐 그다지 대단한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9월 18일. 나도 잊고 있던 내 생일. 그리고 그 애. 어디서 봤는지 그 애는 내 생일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선물을 내밀었다. 무언지 아직 열어보지 않았다. 무언지 열어보지 않을 셈이다. 열어보지 않을 것이다. 절대 열지 않을 것. 그러지 말 것. 원하는 대로 꺾여주지 않을 것.
2018. 09. 19.
열지 마. 무슨 결과를 기대해서 이래.
2018. 09. 21.
당신이 미워. 미워. 미워. 당신을 정말 죽여 버리고 싶어. 너무 더러운 감정들을 적어내는 것이 역겨워 나의 일기장에마저 아무 말도 적지 못하게끔 만들어. 숨이 막혀와. 발버둥 칠 생각도 없어. 신이 나를 정녕 이렇게 죽일 셈이라면, 당신을 먼저 죽여버렸으면 좋겠어.
2018. 09. 23.
네 웃음이 참 예쁘다. 너는 사실 그렇게 웃을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무엇이 너를 그런 표정을 짓도록 만들었을까. 나는 그 웃음의 의미가 궁금하고, 동기가 궁금했다. 그게 그 어떤 마음보다도 사랑에 가까운 감정이라는 걸 내가 모를 리 없다. 네가 한 발자국 더 가까이 있기를 바라는 것. 내가 다가갈 수 있기를 비는 것. 네가 다가오기를 비는 것. 모든 것이 널 향하고 있었다.
2018. 09. 25.
증상이 심해졌다. 구역질이 나올 것 같다. 예전이었다면 술술 썼을 일기도 쓰기가 힘들다. 몇몇 단어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무엇을 잘못해서 벌을 받고 있는 걸까. 무엇이 나의 죄였을까. 그리고 누가 그것을 내게 알려줄 수 있을까. 오직 내가 할 수 있는 일인 걸 나도 알아. 그저 누가 나를 구하러 와 주었으면 했다. 힘을 내기가 두렵다. 의지하는 것으로만 버틸 수 있는 나 자신이 끔찍한 사람이란 걸 나도 안다.
2018. 09. 27.
준영아, 네 이름 석 자를 부르는 일은 언제고 나를 기쁘게 한다. 김, 하고 소리낼 때는 미묘한 설레임을, 준, 하고 부를 때는 포근한 안정감을, 영, 하고 부를 때는 아픔이. 쓰라린 아픔이.
요즘 부쩍 너와 함께하는 시간이 늘었다. 네가 있는 공간은 나를 괴로움으로 이끌지만, 너 자체는 나를 죽도록 행복하게 한다. 그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이라 나는 너에 대한 혼란스러운 감정을 죽기 전까지도 정리해내지 못하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2018. 10. 01
내가 싫지? 낙서는 지긋지긋하다. 쓰레기도 마찬가지로 지긋지긋하다. 그 모든 것은 너임에도 너는 질리지가 않는다. 사랑한다고 네가 질려버릴 때까지 얘기해 주고 싶다. 사랑해. 사랑해. 네 색깔이 너무 좋아. 모든 세상이 네 색이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텐데. 너마저도 보이지 않을 텐데. 그러나 모든 것이 너일 텐데. 사랑해.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2018. 10. 03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잖아. 새삼스럽게 왜 화를 내려고 해. 누구도 내 호감을 달가워하지 않잖아. 그 애만 그런 게 아니잖아. 나를 미워할 수도 있는 거잖아. 나를 미워하잖아. 너는, 내 존재가 사라졌으면 좋겠니? 그걸 원하니?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자신 있는 일인데.
2018. 10. 13.
오랜만이지만 새삼스러운 얘기는 삼가야겠다. 갈대가 흔들리는 이유는 꺾여나가지 않기 위해서이다. 바람이 너무 강해서, 어쩌면 본인이 너무 단단해서.
내가 흔들리는 이유는 죽지 않기 위해서다. 내가 네게 마음을 주고 네 뜻대로 춤추는 이유는 죽지 않기 위해서다. 몰랐지만 나는 어쩌면 너무 살고 싶은 것일지도 몰라. 그리고 그 까닭에 네가 없지는 않을 거라는 작은 확신이 든다. 내일의 너를 보기 위해서. 네가 어떻게 변할지 궁금해서. 그게 지금의 나의 삶이고 나이다. 네가 알면 기겁하겠지만.
나는 이제 네가 어떤 사람인지 확실히 안다. 그럼에도 나는 너를 사랑해. 내가 어딘가 한참 어긋나고 삐뚤어지고 배배 꼬인 사람이라 모든 걸 망쳐버려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이제 너를 조금 더 안다. 나는 너를 안다. 그것에서 오는 안도감은 그 어떤 두려움보다 강했다. 나는 널 위해서 용감해질 수 있다. 나를 전부 버릴 수 있다. 너는 내 모든 것을 준다 해도 받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흔들리는 행위 자체에 모든 의미를 두기로 결심했기에.
2018. 10. 15.
상자를 열었다. 익숙한 갈대 냄새가 났다. 받았던 상태 그대로, 예쁘게 꺾인 갈대였다. 네가 준 것. 그것이 꺾인 갈대라도 나는 사랑할 수 있다. 짓궃기 그지없다. 그래도 나는 갈대를 안고 울었다. 날 생각하며 갈대를 꺾어 왔을 너도, 꺾은 갈대를 다시 한번 부러트리며 즐거워했을 너도 좋았다. 나는 네 뜻대로 되지 않을 거야. 준영아. 나는 네게 흔들릴 거야. 나는 너를 향한 나의 그 무엇도 죽여버리지 않을 거야. 언젠가 또다시 이 일기를 읽게 된다면 알아둬. 나는 네게 아무리 모진 말을 들어도, 네게 맞아도, 네게 진심이 섞인 증오를 받더라도, 나는 꺾지 않을 거야. 나는 너를 사랑할 거야. 그건 너도 어떻게 할 수 없겠지.
18. 10. 16.
나의 호흡아. 나를 사랑해 주세요. 나는 너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다. 나는 너를 위해 준비되어 있는 작은 갈대야. 네가 꺾으며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는 나는 커다란 갈대야. 너를 향한 마음을 담아낼 수 있도록 나는 커지고 있어.
18. 10. 18.
요즈음에는 자주 떨어지는 꿈을 꾼다. 차가운 바닥에 떨어지고서야 나는 편안함에 사로잡힌다. 크려나 보다. 떨어지는 꿈은 키가 크는 꿈이라고들 하지. 나는 자라고 있다. 무엇을 위해서일지는 나를 보고 있는 네가 더 잘 알고 있겠지.
-
"이게 뭐야, 이 미친 놈이..."
준영은 이런 비밀스러운 상황에 놓인 것이 딱히 달갑지 않았다. 학교를 며칠 째 나오지 않은 짝에게 사물함과 책상 서랍의 물건을 가져다 달라는 선생님의 부탁을 받았고, 쓰레기로 가득한 책상 서랍을 뒤져 찾아낸 작은 일기장은 절대 처음 본 모습이 아니었다. 저번에 읽고는 친구들과 키득거리며 즐거워했던 기억이 떠올라 시답잖게 열었던 일기에는 온통 위험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소름이 돋쳤다. 준영은 못 본 척 도망쳐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나의 호흡아. 누군가의 호흡이 된 것에 대한 답지 않은 책임감이었을지도 모른다.
진짜 찾아가야 하나? 무슨 낯짝으로? 지금껏 신나 그를 괴롭히던 것은 준영 그 본인이었고, 그의 사랑을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이용한 것도 준영 본인이었다. 그가 하루 이틀 학교에 나오지 않는 날이 많아질수록 준영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끼곤 했다. 불안함, 물론 본인의 잘못에 대한. 불신, 어디다 이야기 해버렸을지 모른다는 불안한 느낌. 그리고 알 수 없는 감정. 나를 향한 마음의 깊이는 생각보다 깊었던 것일까.
그리고 그 모든 감정들에 대한 해답은 이 일기장에 적혀 있었다. 준영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도망치는 것은 그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
“한승준, 한승준!!”
초인종을 몇 번이나 눌렀는데도 답이 없는 것에 짜증이 났던 건지 준영은 눈 앞의 현관문을 발로 쾅쾅 차고 있었다. 승준은 준영이 일기를 읽을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디서부터 계획한 것인지 계획의 끝은 어디인지 전혀 가늠이 되지 않아 준영은 지끈지끈한 머리를 세게 움켜쥐었다. 준영은 슬슬 화가 나고 있었다. 이 새끼한테 내가 왜 이렇게 매달려야 해. 이 새끼가 뭐라고. 마지막 한 번이라 생각하고 가만히 초인종을 누른 순간, 경쾌한 열림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준영은 잔뜩 화가 나 있었다. 문 앞에서 기다린 것이 장장 20분인데 안에 있었다는 게, 그것도 저런 자식이 나를 기다리게 했다는 게. 이 모든 상황이 짜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승준은 조금 마른 얼굴을 하고 있었고, 준영은 그대로 팔을 휘둘러 그 말라버린 뺨을 쳤다. 아프도록 둔탁한 소리가 났다.
“...잘했어, 죽여.”
-
2018. 10. 21.
너여야지.
나를 망가뜨리는 것은 너여야지.
너밖에 없으니까
네가 해야지.
/ 황정은, 계속해보겠습니다
-
일기장을 열어 보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 안에는 무엇이 담겨 있을까. 어떤 삐뚤어진 것들이 나를 에워쌀 준비를 하고 있을까. 한때 나를 지배했던 것들이 무엇인지 나는 어찌하여 이 글자 뭉텅이로만 기억할 수 있는 걸까. 그때의 너는 어디로 가고 그때의 나는 어디로 가 나는 이 작고 어설프며 서투른 글자로만 너를 추억하며 눈물 흘릴 수 있게 되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