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루] 허수아비
핑율
“형.. 제발 날 버리고 가지 말아줘.”
“혀엉.. 형.. 형..!! 아...”
꺼진 불빛 탓에 회백색으로 가득한 천장과 이마를 타고 흐르는 식은 땀, 귀에 들리는 소리라곤 귀뚜라미 우는 소리 뿐인 이 곳에 훈은 꿈이란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하.. 이젠 꿈에서까지 나오냐. 거친 한숨을 몰아 쉰 훈은 흐르는 땀을 손으로 대충 닦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고, 남들보다 훨씬 빠른 일상을 시작했다. 아직 해가 뜨지도 않은 쌀쌀한 아침, 오직 달빛만을 의지하여 화장실에 들어온 훈은 이미 다 깬 잠이었지만 찬물을 틀어 샤워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크게 들리던 귀뚜라미 소리는 어느새 샤워기의 소리에 감춰져버렸다.
빠른 샤워를 하고 나온 훈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장롱 앞으로 다가갔다. 여길 봐도 정장, 저길 봐도 정장인 옷장에 비슷한 듯 다른 연청색 와이셔츠와 검정 정장을 꺼낸 훈은 익숙하다는 듯 불편한 정장을 입었다. 빗살무늬의 검정, 네이비 색의 넥타이까지 맨 그는 완벽하다며 싱긋 웃어보이곤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방을 크게 울리는 드라이기의 기계음은 아침 5시에 쓰기엔 좀 빨랐지만, 그 소음은 사용자를 제외하곤 크게 들리지 않는 듯 밖은 여전히 조용했다. 그렇게 훈은 아침 6시부터 출근길에 나섰다.
“하.. 고작 그 형이 뭐라고 꿈에서까지 나오냐..”
가만히 버스에 머리를 기대에 창밖만 바라보던 훈은 꿈 속에서 일어났던 일을 다시 한번 곱씹어보았다. 훈이 꿈에서 보았던, 계속 언급하는 그 형은 바로 그의 첫사랑인 태형이었다. 훈이 자그마치 대학교 1학년일 시절, 그는 예쁘게 웃는 태형에게 첫눈에 반해버렸다. 4학년이라는게 믿기지 않는 외모와 그의 친절한 성격은 훈을 끌리게 하기엔 충분했고, 그런 태형의 모습은 훈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끌었다. 항상 사람들 사이에서 다니던 태형이었기에 다가가 말을 걸기 어려웠던 훈은 마음을 접자고 다짐했지만, 의도치 않은 만남과 그 후 먼저 다가오는 태형에 훈은 짝사랑을 더욱 키울 수 밖에 없었다.
“혀, 형! 저 형 좋아해요.”
아, 뭔가가 잘못 된 걸까. 용기내어 둘만 있을 때 고백을 건낸 훈은 미묘한 표정으로 뒷목에 손을 대고있는 태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남자..에게 고백받는 건 처음인 건가.
“저기.. 나 조금 당황스러워서..”
“나.. 많이 좋아해?”
살짝 붉어진 얼굴과 평소보다는 아니지만 올라간 입꼬리의 조화는 완벽했지만, 태형의 슬픔은 그 조화를 깨버리기에 충분했다. 시선처리를 잘 못하겠는지 이리저리 눈동자만 굴리던 태형은 훈에게 본인을 많이 좋아하냐고 물어보았고, 그런 그의 질문에 훈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고마워, 나 많이 좋아해줘서. 음.. 어.. 내가 네가 바라는 그런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 그치만.. 그래도 네가 좋다면.”
“우리 사귈까?”
훈을 제데로 쳐다보지 못하면서, 말을 제데로 잇지도 못하면서 대답을 하는 태형은 그의 눈에 몹시 귀여워 보였다. 사실 그가 뭐라고 하는지 잘 듣지도 못하였다. 단지 사귈까라는 말만, 그때 눈을 맞추는 태형만 바라볼 뿐. 훈은 태형의 말에 세상에서 제일 기쁜 표정으로 그를 껴안았다. 좋아요, 너무 좋아요. 진짜 좋아해요.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귄다고 뭐가 크게 달라지랴. 예전과 똑같은 대우와 여전히 사람들 사이에 둘러쌓여있는 태형에 훈은 짝사랑때와는 다른 아픔, 외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너무 오버하는 거겠지. 다들 그런거겠지. 라며 훈은 혼자 위안을 하곤 했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며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형, 미안해.. 난 주기만 하는 사랑을 하지 못할 것같아.”
“훈아..”
“우리 이만 헤어지자.”
“미안해.”
만약 붙잡는다면 다시한 번 생각해볼 예정이었다. 사실 붙잡기를 원했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너무나도 슬픈 웃음이었다. 이렇게 쉽게 미안하다는 말이 나오다니. 비록 먼저 이별을 요청한 사람은 훈이었지만,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사람도 그였기에 훈은 가만히 서있는 그를 버리고 떠나가버린 태형때문에 펑펑울기 시작했다. 갈대같이 이곳저곳 흔들리던 태형은 금방 새 애인이 생겼고, 그 갈대밭 사이에서 훈은 홀로 서있는 허수아비일 뿐이었다.
그렇게 짧고 쌉싸름한 훈의 첫사랑은 끝나버렸다.
그랬던 그저 짧은 추억이자 상처일 뿐인데. 갑자기 꿈에 나오다니.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훈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첫사랑이라.. 쓸쓸한 웃음을 지은 훈은 태형을 머릿속에서 지우려고 노력했다.
“어.. 어? 기사님 저 여기서 내려요!”
그렇게 딴 생각만 하다가 정류장을 지나칠 뻔했지만.
*
“훈씨 빨리왔네~ 6시 반 출근이라니 너무하지 않아?”
“하하, 어쩔 수 없죠.. 이번 마감 끝나면 휴가 일주일 주신다니까 열심히 해야죠!”
“그래 그래, 편집 수고하고.”
아무도 없던 사무실은 훈이 들어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빈 자리가 들어차기 시작했고, 모두가 집중하기 시작했는지 그들의 얼굴엔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작년부터 잡지사에 들어가 수많은 편집자들 중 한명으로 일하게 된 훈은 마감일에만 가까워지면 분주해지는 사무실에 맞춰 본인의 손도 더욱 빨리 움직이곤했다. 그렇게 마감일에 가까워지기만 하면 일 말곤 다른 일을 하지 않던 훈이었는데. 그런 훈의 손을 멈춘 것은 다름아닌 누군가와 함께 들어온 본부장님의 말 때문이었다.
“자자, 모두 주목. 이쪽은 오늘부터 번역을 도와줄 번역가며 나의 지인인 김태형씨. 모두들 잘 부탁하도록.”
“잘부탁드립니다.”
익숙한 목소리와 미소, 너무나도 낯익은 목소리와 얼굴에 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 꿈이 진짜로 예지몽이었던 것일까. 믿기지않는 현실에 넋을 놓고 바라보던 훈은 주위를 둘러보다 눈을 마주친 태형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밝게 웃고있는 그에 미간을 찌푸렸다. 나를 기억 못하는 건가.
“혹시.. 저 기억 못하는 건 아니죠?”
“그럴리가 있나요.. 그땐 반말했던 것 같은데, 훈 씨 오랜만이에요.”
계속 보이는 태형의 모습에 훈은 일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대체 왜 여기에 있는거지. 머리는 왜 갑자기 갈색으로 탈색하고 파마까지 한거야. 뭔데 저 얼굴과 미소는 여전한거지. 손은 마우스와 키보드에 가 있으면서도 태형만을 뚫어져라 바라본 탓일까. 엉망진창이 된 화면에 훈은 다급히 뒤로가기를 눌러 복구를 했다. 그때였다. 화장실에 가는 것인지 사무실 밖으로 나가는 태형에 이때다 싶은 훈은 그를 따라갔고, 역시나 화장실로 간 것이었던 그에 훈은 먼저 말을 걸었다. 존댓말이라. 이게 너와 나의 거리야. 라는 걸 말해주는 것 같았다. 잘 어울리는 정장에, 어김없이 짓는 슬픈 미소에 훈은 사무실로 돌아가는 태형을 막을 수 없었다. 왜 그런 미소를 짓는 건데.
사무실로 돌아간 훈은 정신없이 번역에 임하는 태형에 정신 바짝 차리고 하자며 본인의 양 뺨을 두손으로 때렸다. 최대한 빨리 마감을 하는거야. 굳센 다짐을 가지고 지금까지 중 최고의 집중력으로 일을 시작한 훈의 화면은 매우 빠르게 넘어갔다.
“아, 태형씨도 참. 재치 넘치셔라.”
“재치라뇨, 이게 다 사회생활 하면서 배운 능글거림이죠.”
나는 안보이나. 신경도 안쓰일 정도로 재미있는 건가. 회사 사람들이 모여 하하호호 웃으며 밥을 먹는 점심시간, 그 사람들 중 단 한명, 훈만이 똥씹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저 지나간 사랑 하나지만 뭐가 이리 분한 건지 훈은 계속 태형만을 째려볼 뿐이었다.
..이게 질투는 아니겠지.
따끔거리는 마음은 화가 아니라 여전히 그를 사랑하여 그럴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이 훈의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절대 그럴리 없다며 벽을 만들어 버린 훈은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 사무실로 돌아갔다.
*
마감일을 향한 5일은 매일 매일이 똑같았다. 달라지는 거라곤 점점 늦어지는 퇴근시간 뿐이랄까. 다른 곳엔 신경쓸 겨를도 없이 5일은 쉴틈없이 흘라갔고, 마지막 마감 원고를 가지고 있는 내가 엔터를 침에 따라 모든마감이 끝이났다.
“와아아아아아!!!”
그 끝이 났다는 걸 알리는 사무실 직원들의 큰 외침 소리. 박수를 치며 수고했다고 나오는 본부장님. 비록 잡지는 내일 출간됨이 분명하겠지만, 모든 게 끝이 난 것처럼 이 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모두 좋아했다.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이 된 것처럼.
“자, 모두 수고 많았고! 오늘은 이만 일찍 퇴근해서 쉬고 내일 다같이 회식갑시다.”
“모두들 수고많았어요. 내일부턴 다시 9시 출근이니 못잔 잠 많이 자고 나오세요. 이만 해산!”
명쾌하게 들리는 본부장님의 목소리는 잠에 침식 된 정신을 조금 깨워주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집에 가자마자 침대에 몸을 뉘인 훈은 바로 감기는 무거운 눈커풀에 곧바로 잠에 들 수밖에 없었다.
“난.. 네가 원하는 사람이 아닐지 몰라.”
아, 또 그 꿈인가. 익숙한 목소리와 말, 가벼운 몸의 느낌에 꿈이란 걸 단번에 알아챈 훈은 앞에 보이는 태형에 한숨을 내쉬었다. 왜 또 나타난 거야. 이제 그만 나타나서 날 좀 그만 괴롭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역시나 나오지 않는 목소리에 훈은 벌린 본인의 입을 다물었다. 울고있었어? 본인에 의해 안긴 태형의 미소는 아름다웠지만 왠지 모르게 그의 눈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왜 울고 있는거야. 왜. 그렇게 잠에서 깬 훈의 눈에도 역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오랜만에 제시간에 출근이지만 그 덕분인지 꽉꽉 들어차는 버스에 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오늘 회식에 형도 오겠지. 보고싶고 묻고싶지만 그러기엔 너무 힘든 그였다. 보고싶다고? 왜? 너무나도 어려운 난제는 오늘도 훈을 괴롭혔다.
*
“다들 별로 할 것도 없을 것 같은데, 일찍 회식하러 갈까요?”
“네!”
저녁 6시. 평소라면 한창 일하고 있을 시간이지만, 오늘은 잡지가 출간되는 날이었기에 다들 각자 할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던 중 반가운 본부장님의 말에 모두들 가방을 쌌고, 회식은 역시 고기라는 그의 말에 모두들 환호성을 지르며 식당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얼마나 먹은 것일까. 가득히 불러오는 배와 몽롱해지는 정신에 더이상 먹으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몰려 든 훈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밤이라 그런지 꽤나 쌀쌀해진 날씨에 몽롱했던 정신은 조금 차려졌고, 멀리서 보이는 푸들같은 갈색 파마머리에 훈의 발걸음은 자동으로 그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형, 거기서 뭐해요.”
“응? 아.. 훈이구나.. 그냥 바람 좀 쐬려고.”
술에 취한 것일까. 예전처럼, 꿈에서 봤던 것처럼 본인에게 반말을 하는 태형에 훈의 가슴을 조금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어땠어요? 저희 회사에서.”
“재미있었지. 오늘 회식을 끝으로 떠나는게 아쉬울 정도로.”
이게 뭔 어색함이냐. 그저 서로 안부만 주고받으며 억지로 정적을 깨던 그들의 사이엔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몇년이 지났는데도 우리 훈이 얼굴엔 하고싶은 말이 그대로 드러나는구나.”
“훈아, 난 사랑이 너무 무서웠어. 사랑으로 인해 받은 상처가 많아서.. 사랑이 부족해서.”
“언제나 애정을 갈구했기에 받는 사랑들은 그냥 다 모아두려고 하는거였지.”
“너도.. 그냥 그 사랑들 중 하나였어.”
웃으며 본인의 아픔을 말하는 태형이 얼마나 짠해보였을까. 뭐라도 말을 해야하나, 라는 생각이 들은 훈이였지만 어떠한 말도 쉽게 할 수 없었기에 그는 가만히 태형을 바라 볼 뿐이었다.
“그치만.. 네가 말했잖아. 주기만 하는 사랑을 더이상 못하겠다고. 나는 언제나 받기만 했고 주는 사랑을 해본 적이 없었어.”
“너같이 떠나보낸 사람만 아마 두발 두손 다 써도 꼽을 수 없을 걸.”
이 사람 진짜 단단히 취했구나. 빨개진 코와 빨개진 볼과 귀, 장난스럽게 말하는 본인의 아픔. 취중진담이라는 말이 있듯 솔직해지는 마법에 걸린 태형의 말은 끝이 없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저 후회될 뿐이야.”
“하나같이 그냥 그렇게 상처주기엔 너무나도 고맙고 미안하고 멋진 사람들이었거든.”
“..그 중 너에게 제일 그랬지만 말이야.”
“네가 떠나고 알아버린거지. 너의 빈자리를.. 그렇게 받았던 사랑에서 처음 느낀 설렘을.”
분명 입꼬리는 위를 향하고 있는데. 태형의 눈에선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는 울고있었다.
“나.. 그냥 너무 사랑받고 싶었어. 어린 시절 받은 비난이 너무 힘들어서 그래서 그랬던 건데..”
올라가있던 입꼬리조차 아래로 내려가자 태형의 눈에선 폭포수처럼 물이 흘러내렸다. 얼마나 힘들었던 것인지, 훈은 태형의 사정을 전혀 알지 못했지만, 그저 지금은 이래야 된다고 이성이 시켜서. 훈은 그를 본인의 품에 안아주었다
“나, 나, 너랑 헤어지고 깨,달았어. 너를 좋아한,다는 걸. 사실, 좋아한다는 감정,도 잘 몰,랐는데 네,가 아니면 안,될 것 같아서..”
“괜찮아.. 괜찮아. 지금이라도 이렇게 말해줘서, 나 좋아해줘서 고마워.”
품에 안겨 끅끅대며 울면서도 멈추지않는 말에, 처음 들어보는 태형의 고백에 훈의 기분은 좋아지기 시작했다. 아, 난 7년간 계속 형을 마음 속에 품어왔던 거구나. 그의 고백을 듣고 본인의 마음을 확인한 훈은 고맙다며 그의 등을 토닥여주었고, 그런 그에 태형은 양 손으로 그의 허리를 꼬옥- 끌어안았다.
“나도 그동안 형 잊은 적 없어. 사랑해, 형.”
“이번엔 떠나지 않고 형 곁을 계속 지켜줄게.”
*
그 날 이후 훈은 태형과의 데이트에서 따로 사랑에 상처받았던 얘기를 듣게 되었다. 부모님의 무관심과 주변 어른들의 비교, 사랑을 받고 커야 마땅할 나이에 혼자 커버렸다고. 그래서 그저 어린아이가 그대로 몸집만 커진 것 같이 어리광을 부려왔다고 말을 해주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으며 짧게 말하는 태형에 훈은 그를 따라 웃었지만, 어린나이에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임을 잘 알겠기에 속으로 마음아파했다. 7년 전, 아직 어렸던 20살의 나는, 그리고 23살의 형은 모르겠지. 수많은 갈대 사이에 서있는 허수아비는 내가 아니라 형이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