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삼] 가을 한 조각
들눕
집에 들어오자마자, 반나절이나 열어뒀던 창문을 닫았다. 이제야 좀 따스한 볕이 내리쬐나 싶었건만. 늦가을이 찾아온 저녁은 손을 뻗어 안아주기 두려울 정도로 몹시 차가울 뿐이다.
슬슬 추워진 날씨를 생각하여 여름 이불을 정리하려고 옷장을 열었다. 넣어두고 둘러 보니 안이 지저분한 게 영 신경 쓰였다. 어쩔 수 없이 정리를 하고 있으니 한쪽에 구겨진 이불 하나가 눈에 띄었다. 갈색빛이 도는 가을에 덮기 딱 좋을 두께의 이불. 아직 푹신했지만, 옷장 냄새가 가 밴 것을 보니 오래 방치된 것 같았다. 아무리 봐도 익숙한 것 같았는데, 돌이켜보니 너와 함께 덮던 거였다.
아, 그러고 보면, 네가 사라졌던 것이 딱 재작년 이맘때 쯤일 거다. 그때도 지금 못지않게 꽤 추웠다.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 가을이라고 하기도 뭐할 정도로, 코트를 여며도 좀처럼 떨칠 수 없는 차가움에 너와 함께 집에만 꼭 붙어 있던 게 희미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요즘 너무 추워졌지 않아?"
오늘 날씨는 정말 따뜻합니다ㅡ 그렇게 강조하는 일기예보를 보고 난 뒤, 같이 밖에 나갔다 왔던 그 날 밤, 소파에서 하나밖에 없는 이불을 나눠 덮고 문득 네게 그렇게 말했었다. 몸을 꿈틀거리면서 그렇다고 고갤 끄덕이는 너.
"그러니까 더 들어와. 그러다 나처럼 감기 걸린다?"
"난 괜찮으니까, 감기 다 낫고 나서 말해."
이 날씨에 가디건도 안 걸치고 다니던 그는 혼자 지독한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찔리고 만 건지, 입을 꾹 다물고 이불을 끌어올린다. 그리고 들려오는 기침 소리. 코까지 연신 훌쩍이고 있는 승준이 영 마음에 걸렸다.
"…배고프지?"
"응, 왜?"
"잠깐 기다려봐."
결국, 나는 그의 만류에도 이불에서 빠져 나와서 부엌으로 향했다. 휴지로 코를 풀고는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뚫어지라 보던 네게, 난 미리 만들어 둔 죽을 가져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죽을 한 숟갈 떠서 입으로 가는 순간, 그가 손사래를 쳤었다.
"…그냥 줘, 내가 먹을게."
처음에는 자존심 때문인가 싶어서 가만히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괜스레 수줍은 마음에 그랬던 것 같았다. 그새 내 손에 들린 숟가락을 빼앗아 가서 꼬박꼬박 죽을 떠먹던 승준이는 단숨에 한 그릇을 다 비워냈다.
"맛있네? 잘 먹었다."
해맑게 웃으며 주는 쟁반을 받아 들고 나도 모르게 그를 흐뭇하게 바라봤었다. 그렇게 그릇을 치우고 나서 다시 서로를 안고 이불을 덮고 있으니 정말 무슨 일이 나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도, 당장 죽을 일이 생기더라도. 너만 옆에 있으면 다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은 늘 해왔는데, 그 순간 확신이 선 것 같았다.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너를 보며.
하지만 그런 생각을 품은 날 비웃듯 너는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졌다. 잠깐 잠들고 일어난 다음 날 아침, 마치 혼자 있었던 것처럼 네 흔적은 더는 남아있지 않았다. 보잘것없는 내가 네게 할 수 있는 건 더이상 없었다. 널 찾아다니면서, 그동안 같이 있어 주면 다 될 줄 알았던 내가 무능력했다는 것이 뼈저리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것도 겨우 나흘이었다. 이내 더이상 찾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날, 나는 온몸에 힘이 다 빠지도록 울고 말았다.
*
여기 있었던 것 같은데. 창고 안 상자를 뒤적이는 손길이 나도 모르게 빨라지기 시작했다. 좌절감에 힘들어할 무렵, 더는 보지 않기 위해 아마 구석에다가 내버려뒀을 거다.
"아, 여깄다."
그동안 열지 않았던 탓에 가득 쌓여 있는 먼지를 털어내고 상자를 열었다. 가득 찬 물건 사이에서 비집고 꺼내 든 사진 액자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더는 보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환하게 웃는 우리의 모습이 선명했다.
"차라리 헤어지자고 말하지 그랬어."
정말, 만약에 우리가 헤어진 거였다면, 적어도 이렇게 헛된 희망을 품고 살진 않았을 텐데. 어쩌면, 널 다 잊고 잘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까맣게 타들어 가는 내 속도 모르고 상자에서 꺼내는 것마다 가득 담겨 있는 너의 애정이 그저 씁쓸하게 다가올 따름이었다.
"…보고 싶어."
*
"…김태형.
ㅡ태형아, 날 잊은 거야?"
덜컥, 갑자기 잠에서 깼다. 앉은 채로 잠이 든 모양이었다. 꿈에서 그리운 목소리를 들었지만 딱 그것뿐이었다. 저 너머 아득하게 들리는 목소리는 내가 미처 답하기도 전에 흩어졌다.
찝찝한 마음을 추스르고 난 뒤 여기저기 널브러진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끝나가기 직전, 마지막으로 손에 있는 액자를 상자에 넣으려다가 방 밖으로 나와 잘 보이는 곳에 올려뒀다. 볕이 닿는 곳에 두니 액자의 분위기가 한결 나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어느덧 오전을 향하는 시계를 보며 부랴부랴 나갈 채비를 했다. 환기를 위해 다시 창문을 열어두자, 밖은 이미 볕이 강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오늘은 따뜻할까. 조금의 기대를 가지고 문을 열었을 때에는 늘 그렇듯 쌀쌀했다.
거리를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한 걸음마다 낙엽이 바스락, 하고 밟힌다. 여전히 마음이 허전했다. 네가 없는 거리와 하루, 이 계절을 결코 가을이라 말할 수 있을까. 아니. 전혀 아니였다. 너라는 단 한 조각을 잃은 나의 가을은 해가 지나도 여전히 미완성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