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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삼] 사랑해서 

'언제부터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김준영이라는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다.'


여름이 끝나가고 가을이 다가왔다. 슬슬 승준의 반 학생들은 하복 대신 춘추복을 입고 등교하기 시작했다. 승준 또한 마찬가지였다. 여름이 끝나가고 춘추복을 입은 승준은 아파트 1층으로 내려와 준영을 기다렸다. 준영은 늘 약속한 시간보다 조금씩 늦게 나오곤 했다. 하지만 크게 신경 쓴 적은 없었다.




"아.. 졸려 죽겠다"




"또 새벽까지 게임했지? 좀 일찍 자. 학교 수업은 제대로 듣긴 해?"




"아 한승준 잔소리 진짜 듣기 싫어. 네가 나 수업 듣는 걸 봐야 하는데"




준영과 승준은 어릴 때부터 쭉 이 동네에 살았다. 어릴 땐 아무 생각 없이 늘 붙어 다녔던 둘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자주 자전거를 타기도 하고 같이 게임도 했었다. 그러나 승준보다 한 살 더 많은 준영이 중학교에 들어가 '이성 친구', '연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을 때부터 둘의 사이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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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승준아"




"왜"




"너 반에 좋아하는 여자애 없냐?"




"도대체 그런 게 왜 궁금해? 요즘 자주 그런 얘기 하는 거 같아. 난 반에 좋아하는 여자애 없어"
"나는 형 학교 늦게 마쳐서 진짜 심심한데."




"그래 뭐, 알았어. 게임이나 할까?"




"콜"




그때까지만 해도 승준은 이성 친구에 대해 별생각이 없었다. 게임하고 자전거 타고 놀러 다니는 게 승준에게는 더 재미있었다. 하지만 준영은 아니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 친구가 생겼다. 이런 준영에 물든 걸까, 승준도 중학교에 들어오고 이성 친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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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가지는 못했지만, 승준과 준영에게는 가끔 여자 친구가 생겼었다. 그런데 승준은 정말로 자신의 여자 친구를 좋아해서 사귀는 걸까, 이 여자 친구도 자신을 좋아해서 사귀는 걸까. 점점 의문이 들었다. 승준이 보기에는 준영 또한 마찬가지로 보였다. 그저 많은 사람들이 자신처럼 행동하니까, 준영도 자신처럼 행동하니까 이상할 건 없다고 결론지었다. 이 사람과 좀 더 특별한 사이가 되어 애정 표현을 하는 게 좋아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했었다.

승준의 이런 단순한 생각은 얼마 오래가지 못했다.
준영 고1, 승준 중3. 준영에게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 준영이형 > 
[야 승준아. 오늘 피곤해서 집 가자마자 자려고. 내일 보자]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자주 연락하고 만나고, 게임도 같이 했던 둘이지만 준영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이후에는 달라졌다. 준영이 보내는 문자만 봐도 승준은 알 수 있었다. 오늘은 그 사람과 좋은 일이 있었나보다. 혹은 그 사람과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보다. 이쯤은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준영에게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고 나서, 승준은 자신이 준영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조금씩 눈치채게 되었다.




"아... 진짜.."




"무슨 일 있어?"




"...."




하루는 준영의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표정은 매우 슬퍼 보였고, 말을 걸어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 보니 울음을 참는 것 같았다. 여자 친구와 헤어질 때 단 한 번도 슬퍼하지 않았던 준영이었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또한, 승준은 자신의 여자 친구가 울었을 때에도 달래주긴 했지만 자신도 마음이 아프다거나 슬프지 않았는데 준영을 보니 달랐다.

이때는 오랜 시간을 함께 해온 친한 친구 같은 형이어서 그런 건 줄 알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준영을 향한 마음은 점점 깊어져갔다.
친구 사이의 감정이라고 더 이상 핑계대지 못할 만큼.



*
*
*



"야 한승준!"




"어?? 아."




준영과 같은 고등학교에 입학한 승준은 학교에서 준영을 꽤 많이 마주쳤다. 그럴 때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준영의 목소리에 승준은 깜짝 놀라곤 했다. 그러면 준영은 뭘 그렇게 놀라냐며 승준을 놀렸다. 그런 준영에 승준도 말장난을 하며 받아쳤다. 승준은 준영을 보면 자꾸 준영과 관련된 잡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준영은 아무 생각 없이 했던 행동이었지만 승준에게는 그러지 않았던 말들. 마치, 준영이 자신을 좋아하는 건 아닐까 생각되게 했던 준영의 행동들. 혹은 자신과 준영이 사귄다면? 같은 상상.

'아니 도대체 왜 내가 그 형을 상대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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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영에게 설레길 몇 번, 승준은 몇 달이 지나서야 자신이 준영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가끔 반 학생들이 맨날 준영과 붙어 다니는 승준에게 너 저 선배랑 사귀냐?라는 농담을 들으면 화들짝 놀라서 아니라고 부정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이런 질문을 한 학생들은 장난이었기 때문에 승준의 수상쩍은 반응에 별생각 없었지만, 날이 갈수록 승준의 행동은 티가 났다. 그만큼 승준의 첫사랑은 서툴렀다.




"형 근데 안 추워? 하복 입었네"




"그냥, 귀찮아서"




"저러다 또 감기 걸려서 골골대겠지 뭐."




"너 요즘 간섭 진짜 많이 한다~ 아, 원래도 그랬나?"




"...원래도 그랬거든? 형은 아직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네."
"형 하도 자주 아파서 얘기했다, 됐냐"




"어휴, 우리 승준이 덕분에 내가 건강하다 야. 잔소리도 많이 해주고"




"뭐, 뭐래? 내 말 듣기 싫으면 듣지 마"




"뭘 새삼스럽게? 야 오죽하면 우리 사귄다는 소문도 돌잖아"
"아님 우리 승준이가 나를 좋아하나~?"




승준은 준영의 말에 헛소리하지 말라고 받아쳤지만 심장이 매우 빠르게 뛰는 게 느껴졌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저런 말을 한다는 건, 준영이 승준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게 뻔하기 때문이다. 조금의 희망도 없었다. 준영은 정말로, 승준과 단 한 번도 사귀고 싶다거나 설레었다거나 한 적이 없는 걸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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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이 빠르게 지나가고 11월이 찾아왔다. 날씨는 금세 추워졌다. 한 달 전만 해도 여름 같았던 날씨가 쌀쌀해지고 가을이 찾아왔다. 일교차도 심해져 밤에는 벌써부터 겨울 같았다. 그리고 승준은 자신이 준영을 좋아한다는 사실에 점점 익숙해져갔다. 좋아하는 사람과 친한 친구라는 이름으로 혼자 짝사랑하며 같이 다닌 지 몇 달, 정확하게 말하자면 좋아하는 걸 인정한 지 몇 달이 지났지만. 아무튼, 승준은 자신이 준영을 좋아한다는 걸 티 내지 않고 쭉 같이 잘 지내왔다.




"아 외투 들고 올걸, 학교 마치니까 엄청 춥네"




"형 어제도 그 소리 했잖아. 외투 좀 들고 오라니까.."
"..나는 별로 안 추워"




"야 역시 우리 승준이밖에 없다니까"




"징그럽게 왜 이런대.. 됐거든?"




마이에 외투까지 입고 있는 승준은, 춘추복만 입고 하교하는 준영이 추워해서 자신의 외투를 벗어 준영에게 주었다. 자신도 살짝 춥긴 했지만 말이다. 진짜 가을이 다 가고 있긴 한가 보다, 준영은 승준이 준 외투를 입었다. 얼마 지나지 않았을까, 승준은 금세 추워졌다.




"야, 너 안 춥냐? 그냥 이거 네가 입어"




"줬다 뺏는 건 안 해. 어차피 나는 감기도 안 걸려.. 형은 자주 아프잖아"




"너 손 너무 차갑다."




준영이 승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러자 승준이 깜짝 놀라며 손을 빼냈다. 승준은 자신의 얼굴이 빨개지는 걸 느꼈다. 집까지 오는 동안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승준이 사는 아파트와, 그 옆 아파트인 준영이 사는 아파트가 보였다. 준영은 승준의 외투를 벗었다.




"형 그럼 내일 봐"




"야 한승준 외투 안 들고 가?"
"한승준!"




멍하니 자신의 아파트 쪽으로 가고 있는 승준은 준영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했다. 준영은 빠르게 승준을 쫓아가 승준의 어깨에 외투를 걸쳐주며 승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갑작스러운 준영의 행동은 또다시 승준을 놀라게 했다. 이번에는 크게 놀라지 않았지만 마치 지금 준영이 자신에게 한 행동이 백허그 같다는 생각이 들어 승준을 설레게 했다.




"너 무슨 일 있어? 엄청 크게 불렀는데도 못 듣고, 집 오는 길에 아무 말도 안 하고"
"되게 기운 없어 보여"




"아무 일도 없어, 그냥 할 말 없어서"




"뭐 그럼 됐고.. 잘 들어가고 내일 보자. 아무 일 없으면 기운 내고 웃기도 자주 웃고. 알았어?"




"..아 알았어! 이 형이 자꾸 아까부터 징그럽게 왜 이래?"




"어, 한승준 웃었다."




준영이 승준에게 기운 내고 웃기도 자주 웃으라며 승준에게 헤드록을 거는 척 승준을 뒤에서 안았다. 아까 외투를 걸쳐줄 때처럼 어깨에 손을 걸치는 게 아니었다. 승준은 준영의 손을 떼어내며 웃었다. 그러자 준영도 웃으며 어, 한승준 웃었다. 하고는 집으로 향했다. 승준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들어갔다.



*
*
*



승준은 알지 못했다. 보통 친구 사이에서는 그런 행동을 잘 하지 않는다. 사실 준영의 행동은 매우 티가 났지만 승준은 준영의 행동을 친구 사이이기 때문에,라고 단정 지었다. 준영 또한 마찬가지였다. 서로를 좋아해서 한 행동을 좋아해서 한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친구 사이이기 때문에.
아니면 좋아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거라고 해야 하나.

준영은 승준을 사랑하기 때문에,
승준은 준영을 사랑하기 때문에 한 행동이었다.













둘은 서로를 사랑해서 그랬다.
사랑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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