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삼콩] 초겨울에, 늦가을에게
훌라후프
아래 작품의 내용은 전부 창작입니다. 실제 인물, 과학적 사실과는 전혀 무관한 픽션임을 알려드립니다.
큰따옴표(" ")안에 있는 대사는 현실에서의 대화, 작은따옴표(' ')안에 있는 대사는 꿈속에서의 대화입니다. 유의하시고 읽어주세요!
꿈에는 당신이 나왔다. 어제와 똑같은 꿈이다. 물론 일주일 전과도 같은 꿈이다. 당신과 대화한다. 일어나면 대화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젠 무섭지는 않았다. 그저 자꾸,
당신이 아직 내 곁에 있다는 착각이 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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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다. 이상하리만치 찬 공기가 나를 감쌌다. 창문을 열고 잤나? 아직 흐린 시선을 천천히 창가로 옮겼다. 닫힌 채 블라인드까지 내려져 있었다. 왜 이리 춥지.. 궁시렁거리며 이불을 걷었다. 기분 나쁜 한기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방 문을 열었다. 한 남자가 보였다. 그가 입을 열었다.
" 안녕하세요. "
대꾸하지 않았다. 잠이 쏟아졌다. 커피라도 마셔야겠다는 마음에 그 남자를 지나쳤다. 그러다 문득 머리를 스쳐 지나간 의문에 뒤를 돌았다. 저 사람, 누구지? 왜 우리 집에 있지? 몽롱하던 정신이 번쩍 든다. 키가 큰 그 남자를 천천히 살핀다. 단추가 전부 잠긴 단정한 검정색 정장과 검정색 넥타이, 검정색 가죽 구두. 거기에.. 연두색 머리칼, 으어, 초록머리. 뭐 연예인인가?
" 그..누구세요? 왜 저희 집에 계세요? "
" 한승준 씨, 맞으시죠? "
내 이름을 알고 있다. 경계해야 할 이유가 하나 늘었다. 스토커인가?
" 맞는데요. 누구신데요? 도둑이세요? "
" 저는 겨울입니다. "
뭐? 기껏 한다는 말이 겨울? 이름이 겨울이라는 거야? 뭐가 됐든, 이상한 사람인 건 확실하다.
" 저, 말씀 안 하시면 경찰 부를 거에요. "
" 최근에 누군가를 죽음에 이르게 하셨죠. "
" 뭐라고요? "
" 근 한 달 내에 주변 사람을 떠나보내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알고 있지? 당신의 친구인 걸까? 당신으로부터 가족이나 친구의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었다. 아니, 알고 있더라도.. 이 태도는 뭐야? 실례 아니야?
" 무슨 말이에요. 어떻게 알아요, 그걸? "
" 표정을 보니 맞는 것 같네요. 그는 한승준 씨에게 어떤 사람이었나요? "
어떤 사람이었냐고? 절대 대체할 수 없는..단 하나뿐인. 소중한.... 아니, 그보다.. 이 사람이 당신과 어떤 관계였는지부터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그걸 왜 물어요? 당신이 어떤 사람일 줄 알고 제가 그런 걸 말해야..하는데요. "
이런. 목이 메었다. 떨리는 목소리를 꾹 억눌렀다.
" 전 최소한 그를 아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
유일한? 당신이 친구 이야기를 한 적이 없는 건 맞지만.. 정말 친구가 없었던 건가? 그보다 사람..이라고 하기 전에 약간 뜸 들이지 않았나? 어어쨌든, 둘도 없는 연인이었지만 멀었던 당신에 대한 이야기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 ..자세히 얘기해 주세요. "
" 드리고 싶어도 해드릴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어 유감입니다만,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그가 죽은 건 사고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
심장이 내려앉았다. 고철 덩어리에 당신의 몸이 무너지는 걸 내 눈으로 봤는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럼 타살이라는 거야, 자살이라는 거야?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약간 슬퍼 보이기는 했어도 날 그리도 사랑해 주던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스스로 죽으려할 리 없다. 이 사람도 증거는 없어 보이지만 당신에 대해 아는 사람임은 분명했다. 그래서인지 이 사람을 쳐낼 수가 없었다.
" 누가 죽이기라도 했다는 거에요, 뭐에요? "
" 나중에 알려드릴게요, 일단 절 따라오시죠. "
그는 팔을 내밀었다. 잡으라는 건가? 그의 팔에 손을 살짝 올렸다. 엄청나게 차가웠다. 깜짝 놀라 손을 뗐다.
" 왜 그러시죠? "
" ..아니. 좀 추워서요. 어디 나갈 거면 옷이라도 좀 걸치고.. "
" 저는 겨울입니다. 겨울의 곁에 계신데, 추울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
겨울? ..아까 저 사람이 그런 소릴 하긴 했지. 코웃음을 치려다 멈칫했다. 아침에 일어날 때 느낀 소름 끼치는 한기.. 사람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의 차가운 체온. ...두려움이 몰아쳤다.
" ..누구에요, 당신? "
" 말씀드렸습니다. 전 겨울입니다. "
" 이름을 말해 줘요, 이름을. "
" 훈입니다. 장 훈. 이름으로 부르시려고요? "
" 네.. 뭐. 외자에요? "
" 그렇습니다만. "
너무 평범한 이름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대체 뭐야? 겨울..? 난치병 같은 건가? 수족냉증? 에이. 말이 안 되지.
" 아 진짜. 제대로 좀 말 해 줘요. 사람이 겨울이라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
" 김준영은 당신 때문에 죽었습니다. "
동문서답.
질문과는 전혀 상관없는 답변.
짜증났지만 짜증낼 틈이 없었다. 추궁해야 했다. 당신이 날 떠난 건 사고였다. 명백한 사고였다. 공사장에서 추락한 철근에 깔려 죽는 건 너무나도 있을 법하고 현실적인 죽음이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눈물을 흘리는 것밖에 없었다. 난 그 순간에 당신과 수십 미터는 떨어져 있었다. 나 때문일 리 없다.
" 무슨 소리에요. 사고였잖아요. 타살도 아니었어요. "
" 당신 때문입니다. "
찔리는 거라던가.. 그런 건 없었다. 내가 왜 당신을 죽이겠어, 그런데 왜 이렇게 숨이 차는 것일까. 이 사람은 무슨 근거로 이리도 확신하는 것일까.
" 그가 인간이라고 생각했습니까? "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뭐래. 사고로 죽은 당신의 애인이 사실 외계인이었습니다~ 같은 헛소리라도 늘어놓으려는 거야? 황당하고 분노가 치밀었다. 손이 떨려오고 목의 핏대가 섰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주저앉았다.
" 괜찮으십니까. "
괜찮냐고? 나에게 당신의 죽음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일 뿐이다. 당신은 그저, 사랑했던 한 순간의 기쁨으로 남기고 싶었다. 이제 와서 죽은 게 사고가 아니라느니, 나 때문이라느니.. 전혀 알고 싶지 않았다. 괜찮을 리 없었다.
"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장 훈, 겨울입니다. 최근에 당신을 떠난 김준영은 가을, 날씨가 많이 추워졌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
또 그놈의 겨울..가을. 무슨 소리인지 도통 모르겠다. 저 사람 입에서 당신의 이름이 나오는 게 싫어. 화를 낼 거야. 제대로 설명하라고 따지고 들 거야..
" 늦가을이니까 춥죠. "
말이 헛나간다. 이 말을 하려던 게 아니다. 그 이름 입에 담지 말아요. 그 사람 이야기 하지 말아요. 이 말이 뭐가 어렵다고.
" 늦가을..맞는 말입니다. 당신은 계절이 왜 반복된다고 생각하십니까? "
" ...지구의 공전? "
" 예.. 그렇게 알고 계시겠죠. "
뭐래. 초등학교 때부터 배워온 과학이 다 거짓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그런 거라면 사이비 종교의 광신도나 다단계라고 의심해 볼 만하다. 그래. 그럼 내 뒷조사를 한 것일 테고. 그런 거라면 이 상황이 납득된다. 경찰에 신고하면 그만. 나 때문에 죽었다느니 그런 거, 다 개소리인 거다.
"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내용은 기밀입니다. 발설은 전적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
그새 어디선가 꺼낸 서류뭉치를 든 이 사람의 모습은 어째서인지 무시할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올려다 봐야 할 듯한..
소름이 돋는다.
당신이 가끔 풍기던 무서운 풍채와 똑같다.
" 지구의 공전과 계절은 아무 관련 없습니다. 각 계절의 관리자가 존재합니다. 봄의 관리자, 여름의 관리자. 가을, 겨울.. 이렇게 네 명이 존재하죠. 관리자가 죽으면 계절이 끝납니다. 다음 해가 되면 다시 되살아나죠. "
" 잠깐, 잠깐만요! 지금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요? "
" 저는 겨울의 관리자입니다. 비정상적으로 차가운 이유도, 한기가 도는 이유도 그 때문이고요. 제가 당신의 집에 들어온 방법도 궁금하시지 않습니까? "
아, 그것도 있었지. 머리가 과부하 상태다. 관리자니 뭐니..
그런데.. 이 사람.
어디 갔어?
두리번거렸다. 뭐야? 방금까지 눈 앞에 있었는데?
" 이쪽입니다. "
목소리는 뒤에서 들렸다. 그 사람의 무릎 아래가 흰색의 기체로..
" 우와악! "
놀랐다. 뭐야? 인간이 아니야? 진짜? 정말 관리자인지 뭔지.. ..겨울인 거야?
" 말씀드렸습니다. 저는..당신과 같은 인간이 아닙니다. 겨울의 관리자, 장훈입니다. "
이젠..꼼짝없이 믿어야 했다.
" 기밀이라더니 나한테는 왜 말해 줘요? "
" 관리자들은 인간처럼 수명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죽음의 순간이 정해지는 조건이 있죠. "
또, 또 동문서답. 그나저나.. 인간이 수명이 정해져 있다.. 관리자라더니, 신을 믿나?
" 그 조건이 뭔데요? "
" 인간에게 일정량 이상의 사랑을 받는 것. "
" 무슨 조건이 그래요? 두루뭉술하고.. 일정량? "
" 계속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한 계절만 계속해서 반복될 테니까요. "
" 그럼..그쪽이 살아있는 한 겨울이 끝나지 않는 건가요? "
" 그렇습니다. "
" 아, 그래서. 이걸 나한테 왜 말해주는 건데요? "
" 당신이 김준영의 애인이었으니까요. "
" ..그쪽이 형을 어떻게 알고. 제가 애인이었던 건 무슨 상관인데요? "
" 그는 가을의 관리자였습니다. "
관리자가 죽는 조건 : 인간에게 일정량의 사랑을 받는 경우.
가을의 관리자 : 김준영.
김준영을 사랑한 인간..
나?
나 때문에 죽었다?
나 때문에.
" 이제 제 말이 이해가 되실런지요. "
" ... "
" 당신을 탓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를 사랑하고 죽이는 일은 누군가 반드시 했어야만 할 일입니다. 그게 당신이 된 것 뿐이죠. "
" ... "
" 제가 당신을 찾아온 이유는..당신을 슬프지 않게 하는 것이 제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죽은 건 자연의 섭리, 계절이 바뀌는 것은 세상의 이치. 당신은 자연에 순응한 것뿐입니다. 그런 당신에게서 죄책감과 슬픔을 덜어 주는 것이 제 일입니다. "
그렇게 몇 달이 지났다.
그 사람은 매일 나를 찾아왔다.
함께 밥도 먹고, 대화 상대도 되어 주었다.
날 슬프지 않게 하려고.
하고 싶은 것이 있냐고 물어보고, 들어주었다.
날 보고 웃어주었다.
내 말에 웃어주었다.
날 보고..
그때부터였다.
" 승준씨? "
" 아. 아. 네에. 생각 좀 하느라고요. "
" 많이 추워졌습니다. 옷이라도 걸쳐요. "
그 말과 함께 내 어깨에는 묵직한 외투가 덮였다. 외투를 만지작거렸다. 당신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나를 보고 웃어주었다.
당신이..
" ..있죠, 훈씨. "
" 네? "
" 전 이제 슬프지 않은데요. 죄책감도 안 느끼고요. "
" 알고 있습니다. "
" 왜 떠나지 않으세요? 당신을 사랑할 사람을 찾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
" ..제가 떠나길 바라십니까? "
" 그렇다고 하면 떠나시려고요? "
" 당신이 슬프면 안 되니까요. "
" 오히려 떠나면 슬플 것 같은데. "
" 뭐라고요? "
" 아니에요. "
부정이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자각하지 못했다.
" 승준씨. 오늘은 어디 갈래요? 이거 먹으러 갈래요? 승준 씨 이거 좋아하잖아. "
" 좋아요. 그치만 이번엔 훈씨가 먹고 싶은 거. "
" 어, 진짜? 내가 골라도 돼요? "
" 항상 나한테 맞췄잖아요. "
" 그렇다면야. "
이 사람과의 생활에도 익숙해져 괜한 정을 느끼고 있었다.
정?
어떤 정이지?
꿈에 당신이 나왔다. 당신이었다. 꿈속에서 당신은 나를 불렀다.
' 승준아. '
' 준영이 형! '
' 보고 싶었어. '
' ...나도. '
' 나만 바라봐 달라고 하지 않아, 승준아. '
' 무슨 소리야? '
' 날 잊어도 돼. 어차피 내년에 난 네 앞에 다시 나타날 거야. '
' .... '
' 뻔하잖아, 승준아. 가을이 가고, 널 달래기 위해 찾아온 겨울. '
' 아니야, 형. '
'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야. 그게 너인 것뿐. '
' 아냐.. '
' 가서 말해, 겨울에게. '
" 승준씨? 다 왔어요. 일어나요! "
' 말해. '
" 승준씨? 일어났어요? "
' 사랑한다고. '
눈물이 흘렀다.
" ..내가 훈씨를 죽일 거에요. "
" 뭐라고요? "
" 당신은 저 때문에 죽을 거에요. 가요. 우리 멀어져요. 가까이 있고 싶지 않아요. "
" 그 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해요? "
" 말 그대로에요. ..저 이제 슬프지도, 죄책감 느끼지도 않으니까 가라고요. 제 곁에 있을 필요 없어요. "
" 거짓말. "
그래, 거짓말이었다. 형 말이 맞아. 난 이 사람을 죽게 할 거야. 사랑하니까.
" 승준씨를 슬프지 않게 하는 게 내 일이라고 했잖아요. 내가 떠나면 슬퍼할 거, 알고 있어요. "
" 가라고요. "
" 날 사랑하는 거에요? "
심장이 뛰었다. 평소보다 몇 배는 빠르게 뛰었다. 떨림이 손끝까지 전해졌다. 당신을 사랑했다. 당신만은 사랑하고 싶지 않았다.
" ...알고 묻는 거죠. "
" 늦가을 치곤 추워서 대충 예상했어요. 이번 겨울은 빨리 오겠네요. "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울면 안 되는데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 나한테 미안해서 그래요? "
그래요. 미안해요. 당신이 죽게 만들어서, 내 이기심에 당신을 사랑해 버렸어요. 그러면서도 부정했어요. 소용없다는 것쯤 알면서도. 부정한다고 없는 감정이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머리에 물이 차오르듯 꽉 막힌 기분이었다. 말이 목에 걸린 듯 나오지 않았다.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눈물을 쏟았다. 떨리는 티를 내지 않으려 온몸에 힘을 주었지만 이는 그저 내 떨림을 부추길 뿐이었다. 온몸이 덜덜 떨렸다. 그러다 등을 타고 어깨에 느껴지는 기분 좋은 무게감과 소름 끼치는 한기. 당신은 조용히 나를 달래 주었다. 나를 토닥였다. 그만하라고 외치고 싶었다. 이럴수록 당신은 빨리 사라질 뿐이라고, 내가 당신을 더 사랑하게 될 뿐이라고.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당신의 손끝에 서려 있는 한기는 너무나도 부드럽고 포근해서, 뿌리칠 수 없었다.
" 훈씨. "
" 네? "
" ..안아주세요. "
당신은 부드럽게 웃었다. 이리도 차가운 당신의 웃음에 나는 이미 동화되어 버렸다.
" 네. "
당신은 날 안아주었다. 차갑고도 따스했다.
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
봄이 지나면 여름, 그 후엔 다시 가을. 계절은 끝없이 반복된다.
지금 나는 가을을 떠나보내고 겨울을 맞이했다.
짧다면 짧았고 길다면 길었던 늦가을이 끝을 맺었다.
일 년을 기다리면 돌아올 당신이지만
그리운 것은 변함없을 것이다.
초겨울에, 늦가을에게.
[FIN.]